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폭풍 직전의 외교상황 == 붉은 군대가 폭풍을 위한 준비를 끝내고 일본 정계와 군부는 본토결전을 외치며 광적으로 방어 준비를 하고 있는 한편, 뒤에서는 '명예로운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명예로운 조건'이 무엇인가 하니 [[진주만 공습]] 이래 미국이 요구해온 무조건 항복까지는 이르지 않는 어떤 것을 뜻했다. [[도조 히데키]]가 실각한 44년 여름부터 일본의 외교관들은 일본이 아직 대사관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던 [[스웨덴]], [[스위스]][* 두 나라 모두 2차 대전 당시 중립국들이었다.], 그리고 소련에서 서방 연합국들과 접촉을 개시할 수 있도록 강화 탐색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1945년 4월, 소련은 소-일 상호 [[중립]]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을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 그리고 일본의 외교 문서에 따르면 소련 내 일본 영사관 직원이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소련이 조만간 일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는 보고를 했으나 대본영에서 이를 무시했다. 소련이 이런 식의 간접적인 대일전 참전 의사를 밝히자 [[일본 정부]]는 경악했다. 소련의 통보에 당황한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가 사임해 버리자 78세의 [[스즈키 간타로]] 남작이 총리로 취임했다. 스즈키 총리는 "우리에게는 싸우는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라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보냈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에게 어떻게든 강화를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이런저런 이유로 손발이 계속 맞지 않고 있었다. 5월 초 [[베를린 전투]]가 임박하자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 무관인 후지마라 요시지로 중좌는 스위스로 잠행하여, 베른 주재 OSS 책임자인 앨런 덜레스와 강화 협상을 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후지마라가 그의 계획을 도쿄에 보고하자, "적의 계략에 빠지지 말라." 는 경고를 받았고, 후지마라는 그의 계획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5월 12일, 강화 안건이 전쟁지도최고회의에서 공개리에 제출되었다. 그 협의외에서는 속칭 '6인 의원'으로 알려진 총리대신, 외무대신, 육군대신, 해군대신, 참모총장, 군령부총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회의 중반에 이르러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대장(계급)|대장]]은 소련에게 일본과 서방 사이의 교섭을 주선해주도록 요청하자고 무뚝뚝하게 제안함으로서, 그의 동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요나이의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며, 오히려 곧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해올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대장은 소련이 미국과 아시아 영토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강력한 일본을 선택할 것이기 대문에 쉽게 소련에 접근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육군대신은 환상 속에 빠져서 제안을 했지만, 스즈키 총리는 도고에게 소련에 접근할 정책수립을 위한 메모를 초안하도록 지시했다. 스즈키는 만약 자기가 반대한다면 아나미와 육군이 독자적으로 스탈린과 접촉할 것을 두려워했고, 도고도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다. 5월 14일, 도고는 그의 메모를 최고협의회에 제출했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읽었다.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일본이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을 할 만한 여력도 능력도 전혀 없었다. 당시 미국과 싸우느라 해군에 몰빵한 일본 해군이 소련 해군은 어린애처럼 이기겠지만 분산된 육군 전력에 그나마 키워논 관동군 최정예들도 동남아로 옮긴데다가 장비나 무기와 보급선까지도 절대적으로 열세인데다 소련의 기후는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 것도 4년이나 걸렸지만 완전한 장악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소련과 시베리아는 이보다 더 광활하면서 더 척박한 지역이다.] 미국은 장차 소련의 적이 될 것이며, 따라서 소련은 일본이 국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메모 내용은 결과적으로 한심한 전망이었지만 도고는 뒤에 제법 현실적인 경고를 덧붙였다. >"만약 스탈린이 평화 중개 역할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로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영토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소련을 통해 강화를 추진하시겠습니까?" 도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인 위원'들은 전원 일치로 그의 진술을 승인했고, 즉시 협상을 개시하도록 그에게 지시했다 . 같은 시기 소련은 일본 전국에 [[B-29]]의 폭격이 계속되자 도쿄 주재 소련 대사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소련 대사관이 위험해지자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는 도쿄에서 110km나 떨어진 한적한 온천지 고라에 머물면서 소련에 대한 일본의 첫 접촉을 지연했다. 6월 3일 전쟁 전 총리이자 전직 소련 대사였던 [[히로타 고키]]는 고라에서 여행하는 도중 우연히 들른 것처럼 꾸며 말리크를 만날 수 있었다. 같은 날 저녁, 만찬을 함께 하면서 히로타는 말리크 대사에게 독일에 대한 소련의 승리를 축하하며, "일본과 소련이 이번 전쟁에서 서로 싸우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고키는 계속하여 일본은 진정으로 일-소 불가침조약의 갱신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히로타는 또한 말리크에게 소련이 일본의 대미 평화 협상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타진했다. 하지만 말리크는 고키와의 만찬부터 그 3주일 후까지 계속된 회합에서, 정중하지만 대단히 애매한 태도로 소련의 중재에 관해 어떤 언질도 주지를 않았다. 이미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일본이 어떤 애원이나 간청을 하든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리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일본은 소련에 '소련이 조선의 해방에 반대한다면 남사할린과 우루프 이북의 쿠릴 열도 및 만주 내 이권을 무상으로 양도하겠다.'라고 제안했으나 대일전을 준비하던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으로 전문을 발송했고, 전문에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상황 심히 심각함]]. 신속한 소련의 태도 표명이 요구됨. 즉각적인 대답을 얻어내기 위한 한층 더한 노력 요망."이라고 써 있었다. 그러나 받은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토는 이전부터 소련은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나, 소-일 중립조약의 갱신에 관심이 없다는 암울한 보고만을 보내던 상황이었다. 사토는 이제 더 이상 행운이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도고의 전문에 회신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8월 8일에, 소련의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저녁 8시에 사토 대사와 만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건 놀랄만한 일이었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몰로토프를 비롯한 소련 외무인민위원부는 스탈린의 지시하에 일본에서 오는 면담 요청을 무시하거나 또는 여러 구실을 내세워 그것을 회피해왔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날 오후 약속시간을 오후 5시로 앞당기자는 소련 외무인민위원부의 요청까지 있었다. 결국 모스크바 시간으로 8월 8일 17시 (일본은 23시) 사토 나오타케가 [[크렘린]]에 나타나자 몰로토프는 지체없이 그를 들어오게 했다. 사토 대사가 러시아식으로 격식 차린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몰로토프는 이를 거부하고 무뚝뚝하게 [[일본 정부]]에 대한 소련 국가 명의의 통고문을 전해주기 위해 사토를 불렀다고 했다. 사토가 외상이 권하는 의자에 앉자, 몰로토프 자신은 긴 테이블 위에 앉아서 문서를 읽어나갔다. >"독일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은 아직도 계속하여 전쟁을 주장하는 유일한 강국으로 남아 있다. (이하 동맹국들에 대한 소련의 신성한 의무에 관해 4개 항목에 걸친 설명은 생략)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소련 정부는 내일, 즉 8월 9일(모스크바 기준)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감을 선언하는 바이다." 이 통고문을 듣고 사토 나오타케는 항의는 이미 아무 소용 없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그의 개인적 위엄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정중한 태도로 물러났다. 몰로토프는 자신이 사토 대사에게 개인적으로 정중한 배려를 해주겠다는 것과, 대사가 원하는 어떤 무전 송신도 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암호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보장은 해주었다. 하지만 사토가 대사관으로 돌아왔을 때,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그는 이미 전화가 끊겼고, 무선 통신 장비도 압수당한 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상업 통신을 이용하여 보내려 했던 전문도 어찌 된 셈인지, 혹은 오히려 당연하게도 전신국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토가 몰로토프의 사무실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시베리아에서는 자바이칼 전선군의 선봉인 제6근위전차군이 모든 [[전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본 관동군에 대한 사형 집행이 시작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